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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한민국 문단의 거목 구상시인 영면하다

기사입력 2004-05-17 18:12:39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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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“신수(身手)야 토종(土種)으론 멀쩡하다. 이목구비가 비교적 정돈되고 키도 알맞게 큰 편이어서, 소싯적엔 에헴! 미동(美童)·미남(美男)이란 소리도 더러 들었다.”(자전적 산문 「예술가의 삶」 중에서)

말년에 짤막한 턱수염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길렀던 고(故) 구상 시인(사진)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문단 안팎에 드리운 영향력이 컸던 품 넓은 시인이었다.

5·16 직전에 쿠데타 모의가 발각돼 쫓기는 신세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달여 숨겨준 게 계기가 돼 그와 친해진 사연은 유명하다.

자전 연작시인 `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'에는 쿠데타 성공 사흘 뒤 朴전대통령이 그를 국제호텔로 불러 `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 주셔야지!'라고 청하자 고인이 “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 두세요!”라고 고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.

이근배 시인은 고인은 그런 저런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이중섭 미술상과 공초(오상순)문학상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'고 말했다.

고인은 한국전쟁 등 역사의 격동기에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해 목소리를 높였다. 1959년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민권수호국민총연맹의 문화부장직을 맡았다가 옥고를 치른 게 대표적이다.

19년 서울 이화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육사업 위촉을 받아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네살 때 원산 인근 덕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. 열다섯살에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했고, 이후 공사판 인부, 야학당 선생 등을 전전하다 일본으로 밀항해 니혼(日本)대 종교과에 입학했다.

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고인은 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발간한 시집 「응향(凝香)」에 `여명도' `밤' `길'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. 하지만 시의 내용이 북한 당국에 반동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월남한다.

한국전쟁 종군 작가 부단장을 지낸 고인은 전쟁 체험을 다룬 연작시'초토(焦土)의 시' 등 많은 연작시를 썼고, 시집'구상' `말씀의 실상' 등을 남겼다. 연합신문 문화부장·영남일보 주필 등을 지냈고 효성여대·서울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금성화랑무공훈장·국민훈장동백장·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.

고인의 문학세계는 `현란한 수식을 피하는 직접적인 시어로 역사적 현실과 종교적 구도의 경지를 추구한 것'으로 요약된다. 고은 시인은 `기교보다 표현의 직언성, 종교철학적인 주제가 두드러졌다'고 말했다
.
그러나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고인의 개인사는 시련의 연속이었다.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던 고인은 60년대 중반 폐 수술을 받아 한쪽 폐가 없이 살았다. 87년과 97년에는 두 아들을 차례로 잃는 슬픔을 당했다.

고인은 지난해 7월 월간 `문학사상'에 발표한 `저승의 문턱에서'라는 시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냈다. `나이도 80세 중반이나 되었고/젊어서 폐 수술을 두번이나 하여/호흡기능의 퇴화로 문 밖엘 못 나가고…'.

고인은 노환으로 투병 중이던 지난해 10월 장애인 문학 잡지인 계간 `솟대문학'에 2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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